
_ Accolade / W. 송강
연구소 안에 감도는 것은 침묵뿐이었다. 잘 닦인 흰 타일들이 그날따라 유독 더 서늘해 보였으며, 나직히 웅웅거리는 기계음이 애써 둘 사이의 긴장을 완화시켜 주는 듯 했다. 한 손에 낡은 검을 든 알피스는 여전히 이 상황을 받아들이기가 어려웠다. 채 한 시간도 되지 않은 시간 동안 일어난 모든 일들의 정보량은, 그가 이해할 수 있는 정도를 현저히 넘어섰기 때문이었을 테다.
언다인이 잔뜩 달궈진 갑옷에서 이유 모를 김이 펄펄 나는 상태로 연구소 문을 박차고 들어왔고, 알피스가 끼얹어 준 얼음물 덕에 얼마 뒤에야 정신을 차렸다. 꽤나 시간에 쫓기는 듯 해 보이던 언다인은 그에게 예전에 쓰레기장에서 주웠던 칼을 들어서 아스고어가 하는 것을 재현해 달라는 나름의 부탁을 했고, 알피스는 그 말의 의미를 이해하는 것만으로도 약간의 시간이 걸렸다. 그는 일단 검부터 찾아 오겠다며 급히 자리를 떴고, 잠시 스쳐지난 제 책상 앞에서 멈춰설 수 밖에 없었다. 언다인의 근위대장 즉위식. 핫랜드를 순찰하는 왕실 기사단이 전해 준 것을 몰래 적어 두고는, 까맣게 잊은 것이다. 허나, 알피스는 오늘이 무슨 날인지 알고 있다는 사실을 차마 그 앞에서 밝힐 수 없었다. 분명 음습하다고 생각할 테지. 그리고 오늘이 그 날이었음을 잊은 내게 무슨 생각을 할까! 잡동사니들을 모아 둔 창고 문을 세게 열어제낀 알피스는 고개를 두어 번 저었다.
쓰레기장에서 모아 둔 인간의 물건들의 대부분은 그리 상태가 좋지 않다. 부식되고 색 바랜 것들을 한참 동안 뒤적이던 그는, 이내 서늘한 감촉이 손에 닿았다. 뜨겁지도 차갑지도 않은 플라스틱 따위의 것들 사이에서 가장 살아 있는 것처럼 한기를 띈 녹슨 가검의 칼자루였다. 그것은 아직 언다인이 견습 기사이던 시절 쓰레기장에서 주운 것이다. 비록 칠이 다 벗겨지고, 이미 무디던 날은 시간 속에 완전히 닳아 없어졌지만 지금까지 주운 검 중에서는 가장 훌륭하다고 판단할 만 했다. 언다인은 그것을 가져가고 싶어했으나, 녹과 물때가 잔뜩 기어오른 모습을 보고는 워터폴에 두면 먼지가 되어버릴 수 있겠다며 알피스에게 넘겨 주었다. 다행히도, 검은 잘 보존되어 있었다. 그는 제 가운에 묻은 먼지를 털어 내고, 양 손으로 조금 무게감이 있는 검자루를 쥐고 다시 아래층으로 향했다.
언다인은 왕실 기사 즉위식에 대해 아는 것이 크게 없었다. 그들은 자신의 왕 앞에 맹세를 했고, 그 문장들이 꽤나 마음에 들었으며, 언젠가 자신도 왕좌 아래에 무릎을 꿇을 수 있게 되리라 막연히 희망했을 뿐이다. 그나마 선선한 연구소의 공기를 들이마시며, 그는 잠시 고개를 들어 시린 청색이 도는 형광등 불빛을 올려다보았다. 역시 눈을 갑옷에 채워 오는 것은 옳은 선택이 아니었던 것 같다는 생각 -그것은 생각보다 일찍 녹아 갑주 안을 끓는 찻주전자만큼이나 불쾌하게 만들었다-이나 위쪽에서 난 덜그럭거리는 소리의 출처에 대한 생각. 익숙한 발걸음 소리가 들릴 때가 되어서야, 언다인은 고개를 낮출 수 있었다. 녹슨 칼을 챙겨 온 알피스는 자신이 아스고어의 대역을 할 수 있을지에 무척이나 고민했고, 최대한 허리를 펴 근엄하게 서 있으려고 했다. 자신보다 배로 긴장한 것처럼 보이는 그 모습에, 알피스를 빤히 내려다본 언다인 또한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 제 갑주를 추렸다.
“진짜 별 거 없어. 내가 말을 멈출 때마다 한 번씩 그걸로 내 어깨를 두드리면 된다고.”
“그, 그건 아는데... 그래도, 나는 폐하가 아니니까...”
알피스의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는 그 앞에서 판금이 거칠게 마찰하는 소리에 묻혀버리고 말았다. 제가 외운 문장들이 또 다시 머릿속에서 사라질까 고민하던 언다인이, 순식간에 그의 발치에 한쪽 무릎을 꿇은 탓이다. 알피스는 잠시 숨을 들이마셨고, 벌써부터 약간 땀이 배어나오기 시작한 손으로 마모된 검자루를 세게 쥐었다. 왕실 기사단의 즉위 의식은 이전에 아스고어가 말해준 바가 있다. 그는 그 주제를 꽤나 재미있다고 여겼고, 자신은 어색히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한평생 그들과 함께할 수 없다고 여겼었지만, 그 순서만은 어렴풋이 기억에 남아 있었다. 언다인을 이렇게 내려다보는 것도, 제 머릿속에서 이뤄진 수많은 역할극 속에서 이런 일을 맡게 되는 것도 처음이었다. 현실은 때로 백일몽보다 더 알 수 없다는 생각이 머릿속을 스쳤다. 그는 한 번 더 크게 심호흡을 했고, 그 기척에 고개를 든 언다인은 고개를 살짝 끄덕여 보였다.
“나. 왕실 근위대장 언다인은, 나약하고 스스로를 지킬 수 없는 이들을 수호하겠으며,”
알피스는 떨리는 손을 천천히 내려 제 앞에 무릎꿇은 이의 오른쪽 어깨에 녹슨 검날을 가져다 댔다. 긴장을 숨기지 못하고 그 위에서 흔들린 것이 쇠붙이 부딛히는 소리를 낸다. 칼자루에 새겨진 무늬가 어느 정도의 마찰을 주기를 바라며, 그는 다시 팔을 들어올린 뒤 검을 언다인의 머리 위로 옮겼다.
“결코 적에게 등을 보이지 않으며, 어떤 모험을 시작하건 간에 그 마지막까지 서 있는 이가 되겠습니다.”
얼룩진 검신이 형광등의 청색광을 반사해 엷은 빛을 내었다. 알피스가 내린 검은 언다인의 머리칼 위를 살짝 스친 뒤, 조심히 다시 들어올려졌다. 몸에 열이 오르는 듯 하다. 알피스의 시선은 갈 곳을 잃었고, 안경 너머로 겨우 보이는 것은 잘 닦은 갑주에 어렴풋이 비춰진 제 모습뿐이었다. 왕은 이런 일로 볼을 붉히지 않을 것이다.
“매사 진실을 말할 것이고, 나의 벗과 동료 기사들의 영광을 지키며, 나의 모든 생을 명예와 영광으로 빛내어,”
언다인은 제 앞에 들이밀어진 검을 보았다. 처음 그것을 보았을 때와 달라지지 않은 모습에, 처음부터 알피스에게 맡기기를 잘 했다는 상념이 들었다. 가장 집중해야 할 순간에 갑자기 끼어들어온 이유 모를 생각에 그는 급히 제 마지막 구절을 떠올리려 했다. 알피스는 여전히 검을 언다인의 가슴께에 겨누다, 이제는 숨조차도 꾹 참고 있는 모양새로 검을 뒤로 거뒀다.
“마지막까지 당신을 신의와 용기로 섬길 것을 맹세합니다.”
마지막으로 제 왼쪽 견갑에 검날이 닿는 것을 느끼며, 언다인은 여전히 무릎을 꿇은 채 고개를 들어올렸다. 그는 알피스를 향해 한 번 웃어보였으나, 이내 잠시 표정이 굳었다. 아마도, 한 단어를 틀리게 말했던 것 같다. 무척이나 익숙하게 나온 문장인데, 핫랜드로 향햐기까지 내리 외우려 했던 것과 조금 어긋난 기분이었다. 그가 무어라 할 새도 없이, 알피스는 바닥에 검을 내버려두고는 긴장이 풀린 양 맨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를 일으켜 주고자 잡은 손은 식은땀에 젖어 있었다. 언다인에게 일으켜지는 내내, 알피스는 꼭 천지를 분간할 수 없을 것 같은 기분이었다. 언다인이 무어라 말하는지도, 자신을 어디에 데려다 놓는지도, 왜 기사단 맹세의 내용이 조금 바뀌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가장 가까운 의자에 알피스를 앉힌 뒤, 언다인은 제 투구를 챙겨 급히 연구소 문을 나섰다. 이유 없이 제 갑주에 막중한 운명이 담긴 것처럼 느껴졌고, 분명히 곧 다가올 즉위식 때문은 아니었다. 이제는 채 기억도 나지 않는 맹세의 문장들과, 어쩐지 즉위식을 완전히 망치지는 않을 것 같은 이유 모를 확신.
* * *
언다인의 즉위식은 성공적이었다. 아스고어는 그가 맹세의 모든 내용을 말할 수 있으리라 믿었다며 자애로운 웃음을 지으며 삼지창의 날을 거뒀고, 이어지는 근위기사들의 박수가 알현실을 채우는 경험은 분명히 그의 생에 있어 가장 빛나는 날들 중 하나일 것이다. 동료들이 마련한 작은 축하연은 꽤 오래 이어졌고, 언다인은 한참 동안의 시간이 지나서야 집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그가 잠에 빠져들려는 순간, 맹세의 마지막 문장이 뇌리를 스쳤다. 그랬음에도, 언다인은 다시 눈을 감았다. 어찌 되었건 간에, 그는 틀린 맹세를 한 것이 아니었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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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약하고 스스로 지킬 수 없는 이들을 수호하겠으며, 결코 적에게 등을 보이지 않으며, 어떤 모험을 시작하건 간에 그 마지막까지 서 있는 이가 되겠습니다.
매사 진실을 말할 것이고, 나의 벗과 동료 기사들의 영광을 지키며, 나의 모든 생을 명예와 영광으로 빛내어,
_ 마지막까지 나의 주군을 신의와 용기로 섬길 것을 맹세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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