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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다알피/알파인] 담청의 회고록

담청의 회고록 _w. 송강

 

 "있잖아, 이제 모두가 나를 영웅이라고 불러."

  ... 불러. 어쩐지 빛을 잃은 것만 같은 하늘빛 꽃잎이 살짝 벌어지며 대답을 건넸다. 워터폴의 메아리꽃들은 긴 침묵에서 벗어났으나, 이들에게 말을 건네는 이는 하나뿐이었다. 얕게 고인 웅덩이의 물이 제 가운을 적시는 줄도 모르고, 알피스는 한참 동안 메아리꽃 군락 사이에 주저앉아 있었다. 그는 때때로 핫랜드에서 빠져나와 아무도 찾아오지 않은 워터폴의 몇몇 공간들을 거닐었다. 그 중에서도 가장 자주 찾으며, 또한 가장 죄악시한 행선지는 괴물들이 소원을 빌던 곳이었다. 이전보다 훨씬 더 낮아진 워터폴의 수위는 이제 알피스의 발목을 겨우 적실 정도였다. 맨발에 난 비늘 사이사이로 서늘한 물이 스미는 감각은 꼭 누군가의 손을 잡았을 때와 닮았다. 허나, 그는 단편적인 감각을 기억할 시간이 없었다. 알피스는 제 발소리를 흡수한 메아리꽃들이 하염없이 물소리를 내는 것을 두려워했다. 자신이 걸음을 내딛을 때마다 이제는 재로 화한 이들의 존재가 하나씩 지워지는 것만 같아서이다. 그의 뒤에서 들려오는 물소리는 하늘빛 꽃들이 서로 공명할수록 더 거대하고 육중해진다. 자신을 집어삼킬 것처럼, 때로는 끝없이 내리는 폭우를 또 어떨 때는 육지를 먹어치우는 해일을 연상시키는 스스로의 죄악들. 끝없는 되먹임을 반복하는 푸른 수중정원은 언제부터인가 알피스의 흔적으로 가득 채워지기 시작했다. 이제는 이루지 못한 괴물들의 소원을 담은 천장의 크리스탈들은 지상의 별이 그러듯 서서히 빛을 잃어간다. 그는 텅 빈 워터폴을 바라보며 거대한 공허감을 느꼈다. 아니, 이는 기시감이었는가? 어린 시절, 여전히 비참하던 시절로 돌아갈 것만 같은 기분이었으나, 그는 이겨내야만 했다. 지도자의 무게는 결코 자신이 일어서기 위한 디딤돌이 아니기 때문이다. 알피스는 침묵에 빠진 메아리꽃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그 또한 무언가를 털어놓을 것이 필요했고, 이 한 떨기 푸른 꽃이 제 안식이 되리라는 그닥 합리적이지는 않은 생각이 그의 뇌리를 잠식했을 뿐이다.

 "영웅이라니. 내가, 내가 한 모든 일들을 알면서도. 너랑 같은 이름으로. ... 정말, 이상하지."

  차마 미안하다는 말은 꺼낼 수 없어서, 그는 이상하다는 말로만 그의 감정을 얼버무렸다. 핫랜드에서 가장 가까운 곳에 있던 메아리꽃. 그가 지도자 자리에 오른 뒤 처음으로 나선 외출을 그만두게 만든 그것. 별 생각 없이 손을 뻗어 만진 벽청의 꽃잎에서는 물소리도 기계음도 아닌 무척이나 익숙한 절규가 들렸다. 이 세계는 살아남을 거야, 이 세계는 살아남을 거야, 이 세계는...... . 알피스는 순간 손을 뻗어 그 꽃을 꺾어 버리려고 했다. 허나, 늘 그랬듯 다리부터 힘이 풀려 주저앉은 그는 제 흐느낌이 그의 목소리를 지워 버릴 때까지 하염없이 절망을 토해내곤 한 것이다. 연구소에서 언다인의 전투를 보았을 때, 알피스는 그저 당혹감에 차 있었을 뿐이다. 그는 모두를 대피시켜야 했고, 사사로운, 또는 무겁게 짓눌러오는 감정들에 젖어 있을 여유가 없었다. 이로 인해 굳게 닫아 두었던 감정이니 눈물샘이니 처절함 같은 것들이 고개를 내민 것은 그가 지도자가 된 이후였다. 알피스는 한참 동안 목놓아 울었고, 그리하여 영웅의 단말마는 영영 이 땅에서 지워지고 말았다. 워터폴의 물이 점차 빠지기 시작함에 따라 가장 변두리에 있던 메아리꽃은 시들어버렸다. 그는 제 옆의, 아직 생명력을 지닌 꽃을 잠시 바라보았다. 그것이 이미 죽어버린 제 동족의 것처럼 미안하다는 말을 반복하고, 뒤이어 온 공간의 메아리꽃이 그의 헛된 사죄를 반복한다면? 상상하기도 싫은 일이었다. 상념을 없애고자 자세를 고쳐 앉음에 따라 그의 꼬리가 약간 흔들리며 검푸른 수면에 궤적을 남겼다. 그 파문으로 인해 그를 등진 꽃이 가벼이 흔들렸다.

 "그러지 말고. 다들 한 번쯤은 해 보는 거잖아. 뭘 망설여?"
 "하, 하지만, 난 딱히 빌고 싶은 소원이... 없는걸."
 "진짜로? 넌 나보다 하고 싶은 게 많을 거잖아! 그, 멋있는 이론 같은 것들 말야."
 "그럼, 음... 지상에 올라가서, 하루 종일... 인간들의 역사에 대해 알아보고 싶어."
 "완전 멋있어! 그래야 내 친구지. 거기에 나도 끼워 줘, 약속이야!"

  약속이야, 약속, 약속! 목소리를 받아들일 준비를 하고 있던 것만 같은 메아리꽃들이 그 청량한 목소리를 복창하는 소리에, 알피스는 꼭 머리를 한 대 얻어맞은 것만 같았다. 어떻게 잊을 수 있으랴! 언다인은 때때로 이곳에서 허무맹랑한 소원을 나누곤 했다. 수많은 괴물들이 찾아와 목소리를 덧씌운다는 것을 구실 삼아, 별 볼 일 없는 바램들을 파문에 묻어버리던 곳. 늘상 아무 말도 않던 저를 외딴 곳까지 데리고 온 언다인은, 그래도 첫 소원이 사라져버리는 건 허무하지 않냐며 인적 드문 곳의 메아리꽃 앞에 자리를 잡았다. 그래서, 처음으로 빈 소원이 그것이었다. 인간에 대해, 그 아름답고도 추한 종족에 대해 알고 싶어하던 열망. 빈 공간을 가득 채운 영웅의 목소리에, 알피스는 저도 모르게 몸을 뒤로 기댔다. 그곳에 누군가가 저와 등을 맞대고 있으리라는 부질없는 공상 때문이었다. 지상에 올라가면 함께 바다에 가는 거야. 네가 그랬지? 거기에는 끝이 없다고. 어쩌면 바다 괴물과 싸우는 영웅을 볼 수도 있을지도 몰라! 늘상 드세던 그이의 목소리가 여전히 들려오는 듯 했다. 그리고 뒤이어, 환히 웃어보이던 모습. 제 양 손을 붙들고, 인공적인 별이 박힌 천장을 가리키며, 과거의 자신이 알려 준 별들의 이름을 멋대로 읊던 목소리. 이곳에서는 북극성과 남십자성이 함께 떴다. 그가 그렇게 말했기에, 영웅이 지키던 곳에는 두 개의 스텔라 마리스가 있었다. 이는 그만을 위한 선원들의 별이다. 이제는 바다를 보게 된 그의 길을 밝혀 줄 길잡이별이다. 바다 위를 떠도는 혼을 인도해, 북극성이 등대 되고 남십자가 성호를 그어 주는 곳까지 그를 이끌 항성들이었다. 알피스는 꺼져가는 별들이 박힌 천정을 다시금, 그리고 오래도록 올려다보았다. 제게는 길잡이가 필요 없었다. 그렇기에 그는, 워터폴의 모든 것이 그를 위해 빛났으면 했다. 또 다시 물소리에 젖어 사라질, 지극한 수용성의 염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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