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몽유록 _ W. 송강
영웅의 탈을 쓴 위선자! 누군가의 외침을 마지막으로, 언다인은 식은땀으로 푹 젖은 침대에서 눈을 떴다. 아무도 없는 침대에서 잠든 날, 그의 무의식은 무척이나 날이 선 형태로 뒤틀리곤 했다. 처음에는 늘 품에 안고 있던 누군가가 없어서 그런 것이라고 판단했다. 그의 연인이 연구소에서 철야를 한다는 문자를 보내면, 언다인은 그이의 울상이 묻어나는 것만 같은 텍스트들을 약간의 미소와 함께 읽어내려갔다. 내일 아침에 좋아하는 가게의 머핀을 사 둘게. 너무 무리하지 말고. 나도 사랑해. 이런저런 약속을 담은 문장들을 전하고, 답장이 채 오기 전에 골아떨어지는 것은 평소와 같았다. 어떠한 변수도 없는 항시대로의 일과를 마친다. 그리고, 잠에 든 지 채 네 시간이 지나기도 전에 서슬 퍼런 악몽에 꿰여 눈을 뜬다. 여전히 어두컴컴한 방 안, 희미하게 빛나는 야광 시계의 시침은 일어나기에는 이른 시간을 가리킨다. 각몽은 빨랐으나, 꿈 속의 장면들이 여전히 어른거리는 것만 같은 감각. 목 뒤를 적신 마른땀에 들러붙은 붉은 머리칼을 대충 한 쪽으로 넘긴 그는 우선 찬 물을 마신다. 그럼에도 무아몽중의 감각이 그를 허물처럼 감싸면, 세수라도 하기 위해 욕실을 찾는다. 언다인은 잠에서 금방 깨는 축에 속했으나, 때로는 그것이 제 눈을 대체해버린 것만 같은 감각에 휩싸이곤 했다. 제 여남은 한쪽 눈마저 간밤의 무의식을 반복 재생하는 영사기로 갈아끼워진 것만 같은 느낌, 또는 확신.
침대에서 내려온 그의 발끝에 채인 것은 누군가의 서늘한 시체였다. 그는 인간을 죽였다. 모두의 구원자가 될 이의 날개를 꺾어내었다. 땅을 짚고 일어나려고 하던 인간의 팔에 힘이 풀리며, 그것은 제 배를 꿰뚫은 창을 향해 떨어졌다. 이는 해야 했던 일이다. 그는 괴물들의 영웅이다! 그렇기에, 인간은, 모든 인간은, 제 앞의 그 인간마저도...... . 언다인은 제 앞에 채인 것이 몽중의 발버둥으로 인해 떨어진 베개라는 것쯤은 알고 있었다. 그는 고개를 저었다. 약간의 가쁜 숨을 몰아쉬고 나자, 일렁이던 침실이 본 모습으로 되돌아온다. 학살극은 없었다. 피칠갑이 된 워터폴의 돌바닥 대신, 그는 매끄러운 원목으로 된 마루 위에 서 있다. 얼마 전 마련한 디퓨저에서 퍼지는 포근한 목련향이 기억 속에 처절하게 남은 혈향을 걷어내었다. 다행히도, 주방으로 내려가 마신 물이 누군가의 생피 같다던가, 녹인 영혼 같다던가 하는 감각은 없었다. 언다인은 유리잔 표면에 응결이 일어날 정도로 차갑던 물을, 곧바로 제 목으로 넘겼다. 식도를 타고 수은주처럼 내려앉는 액체의 감각은 꼭 관통상과 같았다. 그는 차가운 물을 좋아하지 않았으나, 정신을 되찾기 위해서라면 몇 모금이고 마실 수 있었다. 그러나, 그는 잔을 다시 채울 수 없었다. 물통 뚜껑을 다시금 열었을 때 훅 끼친 물비린내가 꽤나 익숙한 기운을 자아내었기 때문이다. 표면에 맺힌 물방울들이 흘러내려 식탁에 얼룩을 만드는 것도 잊고, 언다인은 욕실로 향했다. 메마른 바닥을 걸어가, 무언가로 번들거리는 것만 같은 문고리를 돌리고, 급히 스위치를 눌러 그 안을 빛으로 채우면, 그는 누군가의 영혼을 쥐고 있는 자신을 마주한다. 여전히 혈흔 묻은 갑옷을 입고, 무언가를 해냈다는 미소를 지으며... 이것이 그가 마주하는 그의 두려움이라.
거울에 비치는 욕된 모습에, 언다인은 세면대에 물이 가득 채워지자마자 그것에 제 고개를 처박았다. 부글거리는 물소리에 이어지는 외침들이 서서히 흐려진다. 모두의 꿈과 희망을 제 얄팍한 정의에 꿰어 버린 더러운 영웅. 이는 분명한 두려움이었다. 물 속에서도 선명히 볼 수 있는 그가 눈을 뜨면, 제 모든 것이 괴물들을 속박했다고 손가락질하는 누군가의 얼굴이 보일 것이다. 그는 내도록 눈을 감고, 제 머리 위에서 울리는 목소리들이 사라지기만을 기다렸다. 위선자, 위선자, 위선자. 지상에는 메아리꽃 따위 없을 터인데. 차가운 수돗물이 그의 온도와 동화되어 미직해지기 시작할 무렵이 되어서야 언다인은 고개를 들 수 있었다. 거울에 비친 것은 제 비늘 위를 타고 흐르는 물뿐이다. 손에 쥔 영혼도, 죄악으로 더러워진 갑주도, 심장을 꿰뚫은 창도 없는, 오롯한 자신뿐. 일련의 몽유록이 그제서야 마무리되었고, 그는 천천히 제 걸음을 되짚어 돌아간다. 아무 일도 없었다. 창문 틈으로 들어온 새벽빛만이 모든 것을 알고 있을지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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