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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T/글

[언다알피/알파인] 잔향

잔향 _ W. 송강

 

 허공으로 퍼지는 황금꽃 차의 향이 잠시간 나른해진 감각을 되돌렸다. 눅진한 공기에 물든 향내는 이내 빗방울처럼 온 거실을 적신다. 꼭 갑작스런 소나기에 풋잠을 깬 것처럼, 알피스는 눈을 뜨는 동시에 그의 꼬리를 약간 치켜올렸다. 안경 너머로 서서히 초점이 맞춰지고, 이내 시선에 들어오는 것은 사각형의 목재 테이블과 그 너머로 보이는 거대한 검의 모형이었다. 그는 제 눈을 두어 번 깜빡인 뒤에야, 고작 몇 분 전에 있었던 일을 기억해냈다. 쓰레기장에서 잠시 마주친 언다인이 어쩐지 작별 인사 대신 저를 따라오라고 말했고, 그랬기에 그를 따라 이 집까지 오게 된 것이었지. 허나 자신은 퍽이나 피곤했으므로, 그가 무얼 원하는지 묻는 목소리조차 제대로 듣지 못하고 의자에 앉자마자 쪽잠에 빠져들어 버렸을 테다. 언다인은 그런 알피스를 굳이 깨우려 들지 않았다. 대신, 그는 무척이나 익숙한 동선으로 차를 우렸다. 굳이 말하자면 운명 같은 우연이라고 해야 하나. 쓰레기장에서 무언가를 찾고 있는 알피스를 마주친 순간, 언다인의 머릿속에 전날 받은 이런저런 간식거리의 기억이 스쳐지나갔다. 황금꽃 차와 시나몬 버니가 입맞에 맞았으면 좋겠다- 같은 몹시 우발적인 사고에서 비롯된 행동이었음에도 알피스는 기꺼이 그를 따라와 주었다. 그러니, 주전자가 내는 소리 때문에 그가 잠을 깨지 않았으면 했다. 그는 괜히 차를 더 식혔고, 식탁 의자에 앉은 이가 깨어났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서도, 최대한 소리 없이 찻잔을 내려놓았다.

 알피스의 앞에 놓인 찻잔 속에 든  찻물은 투명한 황색으로 빛난다. 두 손으로 마주잡은 도자기 찻잔에서 전해져오는 금빛 온기, 그 속에서 일렁이는 전등의 그림자와 때때로 피어오르는 옅은 흰빛의 김. 제가 있는 공간에서 살풋 배어나는 물 냄새와 자연스레 섞여들어가는 말린 황금꽃의 담박한 향내는 알피스가 그것을 마시는 일을 약간 주저하게 만들었다. 어쩐지 익숙한 듯한 향 -아스고어와 차를 나눌 때의 기억과는 거리가 멀었다- 에 잠시간 수면을 바라보던 그는, 이내 제 입에 찻잔을 가져다 대었다. 익숙하다. 여러 가지 의미로, 황금꽃은 그에게 의미 있는 꽃이다. 그렇기에 제 입안을 감싸고 도는 미각의 복합체에도 크게 거부감이 들지 않는 것일 테다. 잘 말린 찻잎에서 우러난 단내가 눅진하게 달라붙을 때가 되면 샛노란 꽃잎만큼이나 인상적인 쌉쌀한 맛이 그것을 거두고, 적당히 식은 찻물을 목으로 넘길 때가 되면 왕궁 정원에서 느낀 꽃들의 잔향만이 남는다. 세 모금째, 이제는 그냥 넘겨버릴 수도 있을 만큼만 남은 찻물의 목넘김. 그 순간이 되어서야, 알피스는 제가 느낀 기시감이 무엇이었는지 알아챘다. 분명 황금꽃의 향이 남아 있었다. 그의 체향이라고 한들 보통은 물의 것이 대부분이었으나, 한참 동안 언다인의 곁에 앉아 있던 날, 그는 빗줄기와 함께 제게 스미는 무척이나 익숙한 내음을 느꼈다. 그것은 역설적이게도 서늘한 쇠비린내 사이에서 고개를 내밀고 있었으므로, 쉬이 잊어버린 것이 당연했을 테다. 어린 기사는 왕궁 정원 곁에서 아스고어와 싸웠을 테고, 그 날의 수련을 마치면 어서 돌아가야겠다고 하면서도 왕이 건네는 차 한 잔을 마다하지 않았을지어다. 당연한 사실이었음에도, 알피스는 이를 잡아낸 제 감각에 한참 동안 빈 찻잔만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잔을 내려놓자, 제 앞에 놓인 것은 동그란 빵 몇 개였다. 상념에 빠져 있어 언제 가져다 놓았는지도 눈치채지 못하였던가? 녹은 설탕의 무거운 단내에 계피 향 날개가 돋아 천천히 입맛을 돋우는, 스노우딘 특제 과자. 워터폴의 습기를 머금어 곧잘 파스라지는 감각은 없었으나, 포크의 끝이 페이스트리 표면을 뚫고 들어가는 기분은 늘 약간의 기대를 품게 했다. 알피스의 손에 들린 은빛 식기는 먹음직스러운 갈빛 표면 위, 희뿌옇게 굳은 설탕 시럽에 균열을 만들고, 시나몬 향 가득한 잼 필링까지 부드러이 파고들어간다. 빵을 들어 올려 한 입 베어문 그의 표정이 순간 밝아졌다. 거대한 단맛 속에서 분명히 제 존재를 피력하고 있는 몇 겹의 잘 구워진 과자 반죽 때문인지, 이런저런 향신료와 섞인 덜 녹을 설탕 속이 씹을 때마다 아삭거리며 독특한 식감을 내어서인지는 모른다. 설탕과 계피만으로는 채울 수 없는, 이름 모를 향신로들이 더하는 식감과 더불어, 겉을 둘러싼 반죽 속 버터의 맛이 이를 한데 뭉쳐 여느 것도 제 존재를 내세우지 않게 막아서는 느낌. 한참 동안 접시에 포크가 부딛히는 소리와 버릇처럼 찻잔을 불어 식히는 소리만이 거실을 채웠다. 마지막 한 입의 시나몬 버니를 목으로 넘긴 알피스는 분명히, 기쁜 표정을 지었다. 제 여남은 생각들이 빵 속을 채운 다채로운 단맛과 약간의 알싸함과 함께 제 목넘김을 따라 사라지는 기분이어서, 어쩐지 홀가분하다는 마음마저 들었다. 어쩐지 대단한 미식의 경험을 한 듯한 충만함과 더불어, 무엇보다 익숙한 따스함이 그의 안을 대신 채우는 듯 싶었다.

 핫랜드까지 데려다 줄까? 빈 접시를 보던 언다인의 물음에, 알피스는 저도 모르게 고개를 저었다. 황금꽃 차도, 시나몬 버니도 없었지만, 어쩐지 그것들은 신경쓰이지 않았다. 이대로 있고 싶다느니 하는, 당연하게도 턱끝까지 차오르기만 한 단어들을 말할 수 있을 리는 없었으므로, 그는 조용히 바닥으로 시선을 돌렸다. 언다인은 그를 조용히 바라보았으나, 고개를 저은 것에 대해 결코 못마땅해하는 분위기가 아니었다. 아무렴 상관 없었다. 원한다면 저 너머에서 들리는 빗소리가 그칠 때까지 피아노를 칠 수도 있다. 그리고 만일 정말로 급한 일이 생겨서 알피스가 가 보아야 한다면, 한달음에 그의 연구소까지 달려갈 수도 있는 일이다. 허나, 언다인은 그런 일들이 일어나지 않았으면 했다. 차는 더 끓일 수 있고, 들려주고 싶은 곡들도 많았으며, 무엇보다, 지금 같은 정적이 이유 없이 마음에 들었기 때문이었을 테다. 허공에 남은 찻잎의 향기와 설탕 가루의 냄새와 희미하게 뒤섞인 서로의 존재가 빗줄기를 따라 내리는 동안, 차도 과자도 없는 둘의 다과회는 계속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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